활동

국가성과 시민사회

현대 한국의 정치, 경제, 기술, 문화를 연구하는 학제 간 협력과 국제적 연구 교류를 진행합니다.

연구팀

2026 SNU 국제학술대회 세션: “East Asian International Relations from the Perspectives of Small State’s History”(국가성, DAY 2, SESSION 1, TRACK 1)

2026-08-25

서울대학교 현대한국종합연구단은 8월 21일과 22일 양일간 “Korea as Method”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국가성과 시민사회 팀은 서울대학교 101동 영원홀에서 “East Asian International Relations from the Perspectives of Small State’s History” 세션을 진행하였다. 본 세션은 서울대학교 김종학 교수의 사회 아래 다음 네 편의 발표가 이어졌다.

첫 번째 발표에서 와세다대학교의 오카모토 다카시(岡本隆司) 교수는 “China and Its Dependencies: A Formation of the Notion of ‘Sovereignty’ in Modern East Asia”를 주제로, 중국의 번역된 정치 개념과 국제질서의 관계를 검토하였다. 발표자는 2018년 개정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전문이 대만을 ‘신성한 영토’의 일부로 선언하고 주권과 영토 보전의 상호 존중을 표방하는 것이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지적하였다. ‘영토(領土)’라는 개념은 20세기 초에야 중국에서 형성되었으며, 이는 ‘주권(主權)’ 관념의 형성 및 근대 중국 민족주의의 대두와 함께 등장했다는 것이다. 두 용어는 서구에서 기원했으나 실제로는 일본에서 만들어져 중국으로 유입된 어휘였고, 그 의미는 중국과 서구·일본의 교섭, 그리고 동아시아 전통 질서의 근대적 변용을 통해 형성되었다. 발표자는 18세기 청의 세계질서를 호시(互市), 속국(屬國), 번부(藩部), 직성(直省)의 네 범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한인(漢人)들이 속국과 번부를 구별하지 않고 ‘번속(藩屬)’으로 통칭했음을 지적하였다. 1880년대 주변 지역을 둘러싼 분쟁이 격화되자 청 당국은 번부를 속국과 구분하고 중국에 더 가깝게 묶어두기 위해 ‘속지(屬地)’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 패배와 조선의 ‘독립자주’ 승인, 이어진 열강의 이권 쟁탈과 의화단 사건은 한인 지식층에게 분할(瓜分)의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외곽 속국의 상실이 내지 각 성으로까지 이어지리라는 불안을 낳았다. 그리하여 티베트와 몽골을 이미 상실한 속국들과 구별하는 작업이 중국 ‘국민’ 형성의 첫 단계가 되었으며, 모호한 번속은 속지를 거쳐 신해혁명 이후 종주권이 아닌 주권을 표현하는 ‘영토’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한인 측의 일방적 관념이었고, 한자를 쓰지도 중국에 예속되었다고 여기지도 않았던 티베트인과 몽골인은 오히려 독립을 모색하였다. 발표자는 또한 예수회 이래 서구의 저술이 로마의 provincia와 프랑스 앙시앵 레짐에 유비하여 ‘성(省)’을 청조 주권의 영역으로, 번속을 ‘속령’으로 정착시키면서 좁은 의미의 ‘중국 본토’와 속령을 포괄하는 ‘중화제국’이라는 두 가지 ‘중국’이 공존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다만 실상은 직접 통치의 함의와 달랐으니, 북경 정부는 각 성의 행정을 통할할 수단을 갖지 못했고 신해혁명 이후 대부분의 성이 티베트·몽골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공산당 중국이 옛 청 제국 전역을 단일한 주권 아래 두는 데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 – 대만, 홍콩, 티베트, 신장이 이를 증언한다 – 이야말로 오늘날 중국 정부가 ‘하나의 중국’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고수하는 역사적 배경이라는 것이다.

이어 시마네현립대학교의 이시다 도루(石田徹) 교수는 “쓰시마(對馬)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근세 한일 관계”를 주제로, 쓰시마라는 시각에서 근세 한일 관계를 고찰할 때 드러나는 논점들과 개항기 이후 동아시아사를 이해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을 검토하였다. 발표자는 세 가지 사례를 제시하였다. 첫째는 조선 조정이 쓰시마 도주(宗家)에게 파견한 사절의 명칭 문제이다. 조선은 엄밀한 규정에 따라 이를 ‘문위행’이라 명명했으나 쓰시마 측은 ‘도해역관(渡海譯官)·역사(譯使)·역관사(譯官使)’로 불렀으니, 우리는 이 사절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둘째는 조선국왕이 도쿠가와 쇼군에게 파견한 통신사에 대한 이해이다. 근세 한일 관계를 지탱한 것으로 지적되는 통신사이지만 ‘통신(通信)’의 ‘신(信)’에 대한 이해는 조선과 일본에서 전혀 달랐고, 현대 일본에서는 오히려 또 다른 이해가 보급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근세 한일 관계를 설명하는 ‘교린(交隣)’ 개념으로, 이 역시 조선과 일본 사이의 이해 차이가 작지 않았다. 발표자는 세 사례 모두에서 ‘단어/한자’나 ‘사절 그 자체’는 공유되었으나 그 내용에 대한 이해는 당사자들 사이에서 전혀 달랐음을 강조하였다. 근세 한일 관계를 ‘화이 질서에 기초한 국가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실태는 각국이 같지 않았으며, 이를 부연하면 근대 한일 관계에서도 같은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왜 이해가 달랐는가, 그리고 다른 이해로부터 어떠한 전개가 나타났는가를 사유하는 것이지 이해의 차이를 ‘정답으로부터의 거리’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발표자는 덧붙였다. ‘오차’를 ‘오차’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으니, 과거에 일어난 일은 우선 있던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발표에서, 가나가와대학교의 마르코 티넬로(Marco Tinello) 교수는 “Meiji Japan’s Relations with Ryukyu and Other Small States in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를 통해, 메이지 지도자들이 일본 본토에 관한 불평등조약 개정을 추진하는 동시에 류큐, 오가사와라, 대만, 조선, 태평양 도서 등 새로 획득한 영역에서는 서구의 조약상 권리를 유지하는 정책을 취했음을 논하였다. 따라서 이들 소국과 영토의 병합은 함께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발표의 전제이며, 본 발표는 그중 류큐와 조선의 사례를 다루었다. 발표자는 기존 연구가 1905년 보호국화와 1910년 병합 직전 서구 열강의 묵인이 갖는 중요성을 정확히 강조해왔으나, 1879년 류큐 병합 당시에도 메이지 정부가 열강으로부터 유사한 묵인을 얻었다는 사실에는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1850년대 류큐와 1880년대 조선이 서구 열강과 체결한 조약의 존재가 병합 과정에서 일본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 중 하나였다는 점도 강조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발표자는 이들 국제조약에 초점을 맞추어, 조약을 둘러싼 일본과 서구 외교관들의 교섭이라는 관점에서 두 왕국의 병합을 재조명하였다. 일본 지도자들은 류큐와 조선에서 서구의 특권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잠식에 대한 묵인과 더불어, 류큐와 조선이 국제적 지원을 요청했을 때의 불개입 태도를 확보하였다. 다른 한편 이러한 국제적 묵인은 메이지 일본이 서구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고 청, 류큐, 조선과의 양자 교섭에서 비타협적 태도를 취할 수 있게 한 주요 요인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발표자는 메이지 일본의 영토 팽창을 가능케 한 메커니즘을 규명하고, 일본과 서구 열강, 그리고 동아시아 사이의 상호 연동된 관계를 밝히면서 메이지 지도자들이 이러한 연동성을 자각하고 그 이해 위에 자국 외교를 구축해갔음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발표에서 도쿄여자대학교의 모리 마유코(森万佑子) 교수는 “「소국」을 둘러싼 국제법과 국제정치의 의론: 대한제국의 보호국화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표하였다. 발표자는 19세기 말 조선이 청조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는 한편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고 1882년 이후 미국·영국 등 서구 열강과도 조약 관계를 맺었음을 지적하였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조선은 ‘독립자주국’이 되었고 청조에 대한 공헌전례(貢獻典禮) 등 의례의 폐지가 결정되었으며, 1897년 고종의 황제 즉위와 국호 개정으로 대한제국이 성립하였다. 대한제국은 중화질서의 ‘소국’에서 벗어나 조약체제 아래 청조·러시아·일본과 대등한 제국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은 군사동맹의 성격을 갖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반년 뒤에는 일본 정부가 인정하는 재정·외교 고문의 파견을 규정한 제1차 한일협약을 맺었으며, 1905년에는 열강의 합의를 얻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는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발표는 국제법과 국제정치가 제2차 한일협약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두 층위에서 분석하였다. 첫째로 국제법학자들이 참고한 해외 언론의 보도와 그에 기초한 국제법학자들의 평가를 밝히고, 둘째로 일본 정부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 정부의 대응을 규명하여, 이들이 제2차 한일협약보다도 1904년의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에 의해 대한제국이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고 해석하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발표에 이어 두 토론자의 논평이 있었다. 한양대학교 강진아 토론자는 오카모토 교수의 발표가 외교 용어의 시간적 변화와 번역을 둘러싼 정치적 ‘표상’의 경쟁을 치밀하게 추적하여 상식을 전복하는 쾌감을 준다고 평하면서도, 용어에 집중할 경우 그것을 구사한 집단과 시대적 배경에 대한 고려가 약해질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속방과 번부를 구분하지 않았던 것은 결국 한인 사대부층인데 그 내부의 인식 차이는 없었는지, 번부에 대해서도 서구가 ‘state’라는 표현을 썼는지, ‘속지’라는 조어의 등장 시점과 경위를 추적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아가 중앙집권적 행정을 주권의 근거로 삼을 경우 ‘주권 국가’가 지나치게 협소해지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청대에만 존재한 ‘속지’와 진한 이래 존속한 ‘각성’의 거리가 가까워 보이는 이 장면을 중국사 전반의 특성으로 볼 것인지 특수한 한 국면으로 볼 것인지를 되물었다. 모리 교수의 발표에 대해서는, 당시 국제법상 병합이나 보호국화를 정당한 절차로 인정한 요건은 무엇이었는지, 특히 조약에 서명할 사람이 끝까지 반대할 경우 어떻게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는지를 질문하였다.

서울대학교 정신엽 토론자는 이시다 교수의 발표에 대해, 조선통신사와 도쿠가와 막부 사이에 동일한 대상을 각자의 목적에 따라 상이하게 이해하고 활용한 양상이 발표자가 말한 ‘오차’ 개념과 맞닿아 있다고 보았다. 다만 오차를 오차대로 기술하는 태도에서 나아가, 서계 문제처럼 충돌로 이어진 오차와 ‘신(信)’ 개념처럼 그렇지 않았던 오차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그리고 의미의 어긋남이 실제 정치적 갈등으로 전환되는 데에는 개념이나 인식의 층위 외에 권력관계와 제도 변화 같은 요인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물었다. 티넬로 교수에게는 류큐, 오가사와라, 대만, 조선, 태평양 도서 사이의 상당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의 분석 범주로 묶을 수 있게 하는 공통 기준은 무엇이며 ‘소국’이라는 범주가 어떤 분석적·사학사적 가치를 갖는지를 질문하였고, 아울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가 하와이와 마다가스카르의 선례를 원용한 것을 1870년대 이래 축적된 외교적 학습의 결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병합에 대한 서구의 이의 제기를 봉쇄하려는 수사적 방책으로 볼 것인지를 물었다. 이는 쓰시마처럼 일본 내에서는 일개 영주이면서도 조선과 막부 사이에서 외교 행위자로 존속한 사례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라는, 패널 전체를 향한 ‘소국’의 작업적 정의(working definition)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

이번 세션은 소국의 역사라는 시각에서 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재구성하였다. 청의 번속 체제가 주권과 영토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 메이지 일본의 팽창을 뒷받침한 서구 열강과의 조약 정치, 근세 한일 관계에서 공유된 어휘 아래 잠복해 있던 이해의 어긋남, 그리고 대한제국 보호국화를 둘러싼 국제법과 국제정치의 상반된 해석은, 모두 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소국들의 지위를 어떻게 규정하고 재규정해왔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주권’, ‘속지’, ‘통신’, ‘보호국’과 같은 개념들이 결코 자명하지 않았으며 그 번역과 해석의 간극 자체가 역사적 전개의 동력이었다는 점을 드러냈다는 데 이번 세션의 의의가 있다.

2026 SNU 국제학술대회 세션: “East Asian International Relations from the Perspectives of Small State’s History”(국가성, DAY 2, SESSION 1, TRACK 1)

2026-08-25

서울대학교 현대한국종합연구단은 8월 21일과 22일 양일간 “Korea as Method”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국가성과 시민사회 팀은 서울대학교 101동 영원홀에서 “East Asian International Relations from the Perspectives of Small State’s History” 세션을 진행하였다. 본 세션은 서울대학교 김종학 교수의 사회 아래 다음 네 편의 발표가 이어졌다.

첫 번째 발표에서 와세다대학교의 오카모토 다카시(岡本隆司) 교수는 “China and Its Dependencies: A Formation of the Notion of ‘Sovereignty’ in Modern East Asia”를 주제로, 중국의 번역된 정치 개념과 국제질서의 관계를 검토하였다. 발표자는 2018년 개정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전문이 대만을 ‘신성한 영토’의 일부로 선언하고 주권과 영토 보전의 상호 존중을 표방하는 것이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지적하였다. ‘영토(領土)’라는 개념은 20세기 초에야 중국에서 형성되었으며, 이는 ‘주권(主權)’ 관념의 형성 및 근대 중국 민족주의의 대두와 함께 등장했다는 것이다. 두 용어는 서구에서 기원했으나 실제로는 일본에서 만들어져 중국으로 유입된 어휘였고, 그 의미는 중국과 서구·일본의 교섭, 그리고 동아시아 전통 질서의 근대적 변용을 통해 형성되었다. 발표자는 18세기 청의 세계질서를 호시(互市), 속국(屬國), 번부(藩部), 직성(直省)의 네 범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한인(漢人)들이 속국과 번부를 구별하지 않고 ‘번속(藩屬)’으로 통칭했음을 지적하였다. 1880년대 주변 지역을 둘러싼 분쟁이 격화되자 청 당국은 번부를 속국과 구분하고 중국에 더 가깝게 묶어두기 위해 ‘속지(屬地)’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 패배와 조선의 ‘독립자주’ 승인, 이어진 열강의 이권 쟁탈과 의화단 사건은 한인 지식층에게 분할(瓜分)의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외곽 속국의 상실이 내지 각 성으로까지 이어지리라는 불안을 낳았다. 그리하여 티베트와 몽골을 이미 상실한 속국들과 구별하는 작업이 중국 ‘국민’ 형성의 첫 단계가 되었으며, 모호한 번속은 속지를 거쳐 신해혁명 이후 종주권이 아닌 주권을 표현하는 ‘영토’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한인 측의 일방적 관념이었고, 한자를 쓰지도 중국에 예속되었다고 여기지도 않았던 티베트인과 몽골인은 오히려 독립을 모색하였다. 발표자는 또한 예수회 이래 서구의 저술이 로마의 provincia와 프랑스 앙시앵 레짐에 유비하여 ‘성(省)’을 청조 주권의 영역으로, 번속을 ‘속령’으로 정착시키면서 좁은 의미의 ‘중국 본토’와 속령을 포괄하는 ‘중화제국’이라는 두 가지 ‘중국’이 공존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다만 실상은 직접 통치의 함의와 달랐으니, 북경 정부는 각 성의 행정을 통할할 수단을 갖지 못했고 신해혁명 이후 대부분의 성이 티베트·몽골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공산당 중국이 옛 청 제국 전역을 단일한 주권 아래 두는 데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 – 대만, 홍콩, 티베트, 신장이 이를 증언한다 – 이야말로 오늘날 중국 정부가 ‘하나의 중국’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고수하는 역사적 배경이라는 것이다.

이어 시마네현립대학교의 이시다 도루(石田徹) 교수는 “쓰시마(對馬)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근세 한일 관계”를 주제로, 쓰시마라는 시각에서 근세 한일 관계를 고찰할 때 드러나는 논점들과 개항기 이후 동아시아사를 이해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을 검토하였다. 발표자는 세 가지 사례를 제시하였다. 첫째는 조선 조정이 쓰시마 도주(宗家)에게 파견한 사절의 명칭 문제이다. 조선은 엄밀한 규정에 따라 이를 ‘문위행’이라 명명했으나 쓰시마 측은 ‘도해역관(渡海譯官)·역사(譯使)·역관사(譯官使)’로 불렀으니, 우리는 이 사절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둘째는 조선국왕이 도쿠가와 쇼군에게 파견한 통신사에 대한 이해이다. 근세 한일 관계를 지탱한 것으로 지적되는 통신사이지만 ‘통신(通信)’의 ‘신(信)’에 대한 이해는 조선과 일본에서 전혀 달랐고, 현대 일본에서는 오히려 또 다른 이해가 보급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근세 한일 관계를 설명하는 ‘교린(交隣)’ 개념으로, 이 역시 조선과 일본 사이의 이해 차이가 작지 않았다. 발표자는 세 사례 모두에서 ‘단어/한자’나 ‘사절 그 자체’는 공유되었으나 그 내용에 대한 이해는 당사자들 사이에서 전혀 달랐음을 강조하였다. 근세 한일 관계를 ‘화이 질서에 기초한 국가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실태는 각국이 같지 않았으며, 이를 부연하면 근대 한일 관계에서도 같은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왜 이해가 달랐는가, 그리고 다른 이해로부터 어떠한 전개가 나타났는가를 사유하는 것이지 이해의 차이를 ‘정답으로부터의 거리’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발표자는 덧붙였다. ‘오차’를 ‘오차’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으니, 과거에 일어난 일은 우선 있던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발표에서, 가나가와대학교의 마르코 티넬로(Marco Tinello) 교수는 “Meiji Japan’s Relations with Ryukyu and Other Small States in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를 통해, 메이지 지도자들이 일본 본토에 관한 불평등조약 개정을 추진하는 동시에 류큐, 오가사와라, 대만, 조선, 태평양 도서 등 새로 획득한 영역에서는 서구의 조약상 권리를 유지하는 정책을 취했음을 논하였다. 따라서 이들 소국과 영토의 병합은 함께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발표의 전제이며, 본 발표는 그중 류큐와 조선의 사례를 다루었다. 발표자는 기존 연구가 1905년 보호국화와 1910년 병합 직전 서구 열강의 묵인이 갖는 중요성을 정확히 강조해왔으나, 1879년 류큐 병합 당시에도 메이지 정부가 열강으로부터 유사한 묵인을 얻었다는 사실에는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1850년대 류큐와 1880년대 조선이 서구 열강과 체결한 조약의 존재가 병합 과정에서 일본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 중 하나였다는 점도 강조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발표자는 이들 국제조약에 초점을 맞추어, 조약을 둘러싼 일본과 서구 외교관들의 교섭이라는 관점에서 두 왕국의 병합을 재조명하였다. 일본 지도자들은 류큐와 조선에서 서구의 특권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잠식에 대한 묵인과 더불어, 류큐와 조선이 국제적 지원을 요청했을 때의 불개입 태도를 확보하였다. 다른 한편 이러한 국제적 묵인은 메이지 일본이 서구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고 청, 류큐, 조선과의 양자 교섭에서 비타협적 태도를 취할 수 있게 한 주요 요인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발표자는 메이지 일본의 영토 팽창을 가능케 한 메커니즘을 규명하고, 일본과 서구 열강, 그리고 동아시아 사이의 상호 연동된 관계를 밝히면서 메이지 지도자들이 이러한 연동성을 자각하고 그 이해 위에 자국 외교를 구축해갔음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발표에서 도쿄여자대학교의 모리 마유코(森万佑子) 교수는 “「소국」을 둘러싼 국제법과 국제정치의 의론: 대한제국의 보호국화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표하였다. 발표자는 19세기 말 조선이 청조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는 한편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고 1882년 이후 미국·영국 등 서구 열강과도 조약 관계를 맺었음을 지적하였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조선은 ‘독립자주국’이 되었고 청조에 대한 공헌전례(貢獻典禮) 등 의례의 폐지가 결정되었으며, 1897년 고종의 황제 즉위와 국호 개정으로 대한제국이 성립하였다. 대한제국은 중화질서의 ‘소국’에서 벗어나 조약체제 아래 청조·러시아·일본과 대등한 제국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은 군사동맹의 성격을 갖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반년 뒤에는 일본 정부가 인정하는 재정·외교 고문의 파견을 규정한 제1차 한일협약을 맺었으며, 1905년에는 열강의 합의를 얻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는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발표는 국제법과 국제정치가 제2차 한일협약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두 층위에서 분석하였다. 첫째로 국제법학자들이 참고한 해외 언론의 보도와 그에 기초한 국제법학자들의 평가를 밝히고, 둘째로 일본 정부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 정부의 대응을 규명하여, 이들이 제2차 한일협약보다도 1904년의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에 의해 대한제국이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고 해석하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발표에 이어 두 토론자의 논평이 있었다. 한양대학교 강진아 토론자는 오카모토 교수의 발표가 외교 용어의 시간적 변화와 번역을 둘러싼 정치적 ‘표상’의 경쟁을 치밀하게 추적하여 상식을 전복하는 쾌감을 준다고 평하면서도, 용어에 집중할 경우 그것을 구사한 집단과 시대적 배경에 대한 고려가 약해질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속방과 번부를 구분하지 않았던 것은 결국 한인 사대부층인데 그 내부의 인식 차이는 없었는지, 번부에 대해서도 서구가 ‘state’라는 표현을 썼는지, ‘속지’라는 조어의 등장 시점과 경위를 추적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아가 중앙집권적 행정을 주권의 근거로 삼을 경우 ‘주권 국가’가 지나치게 협소해지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청대에만 존재한 ‘속지’와 진한 이래 존속한 ‘각성’의 거리가 가까워 보이는 이 장면을 중국사 전반의 특성으로 볼 것인지 특수한 한 국면으로 볼 것인지를 되물었다. 모리 교수의 발표에 대해서는, 당시 국제법상 병합이나 보호국화를 정당한 절차로 인정한 요건은 무엇이었는지, 특히 조약에 서명할 사람이 끝까지 반대할 경우 어떻게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는지를 질문하였다.

서울대학교 정신엽 토론자는 이시다 교수의 발표에 대해, 조선통신사와 도쿠가와 막부 사이에 동일한 대상을 각자의 목적에 따라 상이하게 이해하고 활용한 양상이 발표자가 말한 ‘오차’ 개념과 맞닿아 있다고 보았다. 다만 오차를 오차대로 기술하는 태도에서 나아가, 서계 문제처럼 충돌로 이어진 오차와 ‘신(信)’ 개념처럼 그렇지 않았던 오차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그리고 의미의 어긋남이 실제 정치적 갈등으로 전환되는 데에는 개념이나 인식의 층위 외에 권력관계와 제도 변화 같은 요인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물었다. 티넬로 교수에게는 류큐, 오가사와라, 대만, 조선, 태평양 도서 사이의 상당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의 분석 범주로 묶을 수 있게 하는 공통 기준은 무엇이며 ‘소국’이라는 범주가 어떤 분석적·사학사적 가치를 갖는지를 질문하였고, 아울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가 하와이와 마다가스카르의 선례를 원용한 것을 1870년대 이래 축적된 외교적 학습의 결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병합에 대한 서구의 이의 제기를 봉쇄하려는 수사적 방책으로 볼 것인지를 물었다. 이는 쓰시마처럼 일본 내에서는 일개 영주이면서도 조선과 막부 사이에서 외교 행위자로 존속한 사례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라는, 패널 전체를 향한 ‘소국’의 작업적 정의(working definition)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

이번 세션은 소국의 역사라는 시각에서 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재구성하였다. 청의 번속 체제가 주권과 영토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 메이지 일본의 팽창을 뒷받침한 서구 열강과의 조약 정치, 근세 한일 관계에서 공유된 어휘 아래 잠복해 있던 이해의 어긋남, 그리고 대한제국 보호국화를 둘러싼 국제법과 국제정치의 상반된 해석은, 모두 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소국들의 지위를 어떻게 규정하고 재규정해왔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주권’, ‘속지’, ‘통신’, ‘보호국’과 같은 개념들이 결코 자명하지 않았으며 그 번역과 해석의 간극 자체가 역사적 전개의 동력이었다는 점을 드러냈다는 데 이번 세션의 의의가 있다.